여성 사회 사업가로 유명한 백선행(1848∼1933)은
수원에서 태어나서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딸이라는 이유로 이름도 갖지 못하고 지냈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14세에 이른 나이에 결혼했으나
2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삯바느질과 길쌈 등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열심히 일해
결국 부자가 됐습니다.
1917년, '좋은 땅이 있으니 사라'는 제안에
백선행은 대동강 건너편 만달산을 거액에 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이었습니다.
그녀가 살던 평양 시내엔 그녀가
망했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주변에서는 차라리 땅을 다시 팔아버리라는 제안에도
그녀는 다시 묵묵히 일만 했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사기가 맞다면 다른 이에게 손해 보게 하지 말고
그냥 내 선에서 끝내버리자'
그러던 어느 날, 돌산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시멘트 사업가인 일본인 오노다였습니다.
알고 보니 시멘트 제조에 필요한 석회석이
그 돌산에 풍부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20배 넘는 가격으로 돌산을 되팔았고
그곳엔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공장이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직하고 착실하게 일한 그녀를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그녀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아래의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도와줘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 다시 너에게 그 선행이
반드시 돌아온다."
그녀는 어머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평양시 대동군에 큰 다리를 만들어 줬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학교에 다니지 못했기에
어린 학생들이 자신과 같이 배우지 못하는 설음을 갖지 않도록
광성 보통학교, 창덕 보통학교, 평양 숭현학교 등에
약 4만 평의 땅을 기부하여 재단법인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크고 작은 선행을 베풀었던 그녀를
훗날 사람들은 '백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백선행은 현재 가치로 300억이 넘는 금액인
전 재산을 평생에 걸쳐 사회사업에 바쳤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에 1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고
장례식은 한국 여성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더 중요한 가치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투자합니다.
# 오늘의 명언돈이란 써야 돈값을 한다.
쓰지 않는 돈을 모아서 무엇에 쓰려는가.
– 백선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