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은 다산이 33세 때였습니다. 그해는 심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저곳에는 탐관오리들이 착취의 버릇을 못 버리고 백성들이 도탄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정조대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일대에 10명의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실태를 파악하여 탐관오리들의 잘못을 적발해 징치하여 민생을 돌보라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벼슬이 홍문관 교리(校理)에서 수찬(修撰)으로 바뀐 다산은 경기 북부의 네 고을을 염찰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양주를 거쳐서 들어가는 적성(積城:파주지역)·마전(麻田:이북땅)·연천(連川)·삭녕(朔寧:이북땅)이 목표 지역이고 파주를 통해서 나오도록 했으니, 실제로는 여섯 고을을 암행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음력 10월29일에서 11월15일 까지의 보름동안으로 기일을 정해주고, “수령의 잘잘못을 조사하고 민간인의 고통을 찾아내는 것이 암행어사의 직책이다….”라고 임금은 출발하는 암행어사들에게 훈시했습니다.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한 다산의 보고문이 전해집니다. “먼저 적성에서 삭녕에 이르기까지 마을 구석구석을 드나들며 천민들 사이에서는 신분을 감추고 각별히 염탐하여 확실한 사실을 얻어냈으며, 혹 출두하여 샅샅이 조사하기도 하고, 혹 자취를 숨기고 다시 살펴본 다음에 해당 고을 수령의 옳고 그른 일에 대해 소상하게 열거해서 논했고, 지나가는 각 고을의 실태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들어서 논했습니다….” 빈틈없고 철저한 성격의 다산은 참으로 충실하게 염찰의 업무를 마쳤습니다. 그러한 뒤 서울로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다산의 뜻과는 달랐습니다. 직전의 연천 현감 김양직(金養直)과 삭녕의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은 수령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로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착취를 일삼던 탐관이었음을 밝혀내 중벌에 처해질 것을 요구했지만, 김양직은 궁중의 지관(地官)이며 강명길은 궁중의 어의(御醫)로서 임금의 최측근이던 이유로 처벌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에 다산은 분노하여 임금에게 직보(直報)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탐관오리로서 엄연히 법을 어겼는데 그대로 놓아두고 죄를 묻지 않으신다니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用法宜自近習始] 신의 생각으로는 이 두 사람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면밀히 취조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여 민생을 소중히 여기고 국법을 존엄하게 해준다면[以重民生 以尊國法], 못내 다행스럽겠습니다.” 「경기어사 복명 후의 상소(京圻御史復命後論事疏)」
이런 상소를 받은 정조는 가차 없이 두 사람을 징치했습니다. 요즘 「성완종 리스트」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법의 기강을 세우고 국기가 튼튼해지려면, 법의 적용에서 권력의 최측근부터 손을 봐야 한다는 다산의 주장이 정말로 옳습니다. 만약 법을 어긴 권력의 실세를 징치하지 못하는 법의 적용은 법의 존재를 부정하는 통치자의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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