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잉크가 낫다
국내의 한 유수한 기업이 지난해 초 홍콩으로 섬유제품을 수출키로 계약했다. 그러나 그 뒤 제품의 국제가격이 떨어지자 홍콩 기업은 하자를 이유로 인수를 거부하고 이미 지급한 물품대금의 반환을 청구했다. 분쟁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자 양측 기업은 영국에서 중재를 진행했다.
그들은 각기 필요한 자료를 내놓고 직원들을 증인으로 세웠다. 홍콩 기업은 거래가 시작돼 분쟁이 발생할 때까지 오고간 모든 통신문과 한국 기업에서 받았던 팸플릿, 시제품, 메모 등을 잘 정리해 자료로 냈다.
반면 한국 기업은 담당자가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둔 데다 당시 사무실을 옮기느라 관련 서류철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쩔쩔맸다.
1주일 만에 겨우 서류철을 찾았지만 거기엔 상대방이 낸 자료의 절반도 안되는 서류만 보관돼 있었다. 게다가 수신팩스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흐릿해져 읽을 수 없었다. 감광지를 이용한 서류를 그대로 보관했기 때문이다.
또한 홍콩 기업은 담당직원이 회사 입장을 항상 서신으로 작성해 보냈으나 한국측은 대부분의 경우 전화로 이의를 제기하고 서신은 보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중재의 결과는 뻔했다. 자료·증거 부족으로 한국 기업이 졌다.
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제품의 하자 여부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분쟁은 법률이론보다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어떤 제품을 주문했는지, 주문할 때 요구가 무엇이었는지, 제품을 받았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 양측이 어떤 교신을 했고 자료는 남아 있는지 등이 사실관계다. 이는 중요한 증거자료로 소송이나 중재 때 제시된다.
증거자료가 없으면 사실관계를 입증할 수 없고 입증하지 못한 주장은 인정되지 않는다. 자료 관리를 소홀히 하는 기업은 결코 경쟁력을 유지하거나 높일 수 없다.
기록을 남기는 것도 경쟁력
우리 기업들은 좀처럼 메모를 하지 않는다. 거래 기업과 수많은 전화를 주고받아도 통화 내용을 메모해 파일에 보관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회의를 해도 그 내용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외국 기업들은 거래 상대방과 구두 회의를 한 뒤 자신들이 이해한 회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편지로 보낸다. 그들은 특히 회의에서 상대방 주장에 반박했을 경우 나중에 그 내용을 자세히 적어 보내고 분쟁이 생기면 그것을 증거로 제시한다.
반면 우리 기업들은 희미하게 기억하는 증인밖에 내세울 게 없는 경우가 많다. 정보를 모으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만 수집한 정보나 자료를 잘 정리, 관리하는 기초적인 일에는 무관심하다. 거래 기초 서류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다. 기록, 정리, 관리를 습관화, 시스템화해 정보를 가치있게 활용하고 경쟁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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