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한국 가요계의 전설로 불리는 현인이 1953년에 발표한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소절입니다.
노래는 중공군의 남하로 후퇴를 하게 되자 피난민과 연합군이 뒤섞인
흥남항의 아픔을 담고
있습니다.
함흥의 남쪽 원산이 함락되자 퇴로가 차단된 연합군은
흥남부두를 통해 전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는 후퇴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행히 후퇴 시간은 벌었지만 흥남부두로 모여든 수십만의 피난민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우리 군 장성들의 설득으로
수송선 남는 공간에
피난민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피난민을 위해 600만 톤의 장비를
버리고 와야 했습니다. 정원의
10배가 넘는 인원이 배를 채웠음에도
피난민을 태울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피난민은 서로의 가족과 헤어지거나 일부만 남쪽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피난민들의 설움과
아픔,
그리고 헤어진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연고도 없는 부산 인근에서 장사치로 힘겹게 하루를
살아내지만
여전히 마음은 고향과 가족을 향하고 있는 이산가족의 아픈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분단의 아픔이
무뎌지는 동안
1세대 이산가족의 이름도 시간 속에서 조금씩 지워지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분들은 체념 속에서 그리움을 감추며
살아가고,
우리들의 관심도 이젠 치열한 삶의 핑계 속에 감춰버립니다.
오래간만에 이산가족이 만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주름진 손이라도 만져보는 기회가 얼마나 소중했을까요?
이산의 아픔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래봅니다.
류중현 /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