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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개발] * 명사 21인 내 인생을 바꾼 ‘이 한권의 책' 등록일 2002.12.31 21:25
글쓴이 최상용 조회/추천 1235/2
* 명사 21인 내 인생을 바꾼 ‘이 한권의 책'

이 시대의 절대 화두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은 입력한 자료 이상의 새로운 결과가 나올 수 없는, 0과 1로 이루어진 2분법의 세계다.

때문에 지금 절실한 것은 디지털 사회의 내용을 채워갈 다채로운 생각과 경험이다. 다양한 독서 경험은 창의성과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이에 ‘월간중앙’은 한 권의 책이 인생 행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 사회 어른들의 증언을 모았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꺼져가는 독서열을 조금이라도 진작하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다.

강내희·권영길·금창태·김광웅·김진선·김창국·노무현·박관용·
서청원·손학규·안병호·유시춘·이기우·이무영·이필상·임진택·
장기표·전철환·정동주·한명숙·한화갑 (가나다순)

‘월간중앙’은 내게 인생을 바꾼 책 한 권을 소개해달라고 했지만, 내겐 그런 책이 없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책 저책 읽는 사이에 인생 행로가 정해진 것은 분명한 듯한데, 어느 한 권의 책을 접했다고 인생이 바뀐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나의 독서인생에는 그만큼 극적인 계기가 없었다.

물론 중요한 책이 있기는 하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자꾸 들춰보는 책들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자본론’을 읽으며 나는 근대사회의 구성 원리를 이해하는 지침을 얻고, ‘햄릿’에서는 근대적 인간의 특징들을 관찰한다.내게 중요한 책은 내가 싫어하는 세계관을 품은 것들도 있다.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꼼꼼히 읽어야 했던 에드먼드 스펜서의 ‘페어리 퀸’과 밀턴의 ‘실락원’은 좋아했다기보다 증오한 작품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초기 서양이 ‘타자’(他者)를 사유하는 방식을 ‘징후적(徵候的)으로’ 읽는 데는 이들 작품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내 독서의 한계는 읽고 나면 내용을 거의 깡그리 잊는다는 것일 게다. 가끔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 읽다 밑줄까지 그은 것을 보면 이걸 언제 읽었던가 하고 자문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때 울면서 읽었으나 이제는 제목도 모르는 만화책, 뒷부분이 찢겨나가 흑의 기사인가가 도끼로 성문을 내리찍는 데까지밖에는 못 읽은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

그리고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등 상당수 책들은 아직도 생생한 장면이 되어 나타나곤 한다. 이때는 옛 삶의 일부가 다시 살아나 다가오는 것만 같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1994년에 나온 이 책을 읽은 지는 좀 되었다. 미국 노동운동사를 다룬 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 노동운동이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미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절의 기원이 될 정도로 강력했다.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기까지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운동은 정치영역에서 타협적인 노선을 취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포기하고 민주당과의 정책연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국 노동세력은 독자정당을 갖지 못한 채 강력한 정치세력화에 실패하고 말았다.이같은 독자적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는 전체적으로 미국 사회의 진보를 좌절시켜 결국 미국이 노동운동의 근원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패권주의 일변도의 수구 보수화 과정을 밟게 만들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가의 양당제도가 노동계급 내부의 문화적 간극을 뛰어난 솜씨로 조정, 강화하여 노동자를 재흡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접하면서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의 퇴보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실패는 사회 전체적으로 진보 프로그램의 진전을 더디게 하고 약화시킨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진보정당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구성요소다. 진보정당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하나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보정당이 내는 목소리는 그 신선한 목소리만으로도 사회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그 건강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요소가 될 것이다.

이 측면에서 이런 과거 미국의 경험은 오늘날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발전 과정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나에게도 사회 진보를 위한 실천 지침을 안겨준 소중한 책이다.

나는 올해로 37년에 걸친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대학 강단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걸어온 언론인으로서의 하루하루는 언론을 통해 법질서와 사회정의를 구현해 보고자 나름대로 고민하고 투쟁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 파동, 대통령의 영구집권의 길을 트기 위한 유신헌법 제정, 이에 저항하는 재야와 야당,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한 긴급조치와 같은, 법이 파괴되고 유린되는 일상 속에서 법은 어떠해야 하며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신문이 제시해야 할 가장 큰 과제였다.

여기에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로 자리잡은 부정부패 문제는 환경감시자(Watchdog)로서의 언론매체가 척결에 앞장서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 역할이었다.

한 사회가 건전하게 유지되고 발전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언론이 그 기능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선기자 시절 취재현장에서 그리고 편집국 간부로 기사를 취사선택하고 제작 방향을 정하는 데스크를 맡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 법과 정의의 문제였다.

부자의 돈지갑과 가난한 서민의 한숨이 현실의 법 앞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강자의 탈법은 묵인되는데 약자의 잘못은 가차없이 처벌받는 경우라든가 법이 특정인만을 처벌하거나 강제하기 위해 적용되는 경우에도 언론은 준법정신만을 강조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을 읽으며 지면 제작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예링(R.V. Jhering)은 ‘불법이 법(法)을 몰아냈을 때 불법을 탄핵할 것이 아니라 이를 감수한 법(法)을 탄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불법적 침해에 대해 권리를 방위하는 일, 즉 권리를 위한 투쟁은 침해받는 개인의 의무이며 나아가 사회 공공에 대한 의무’라고 역설했다.

법의 목표는 평화이지만 도달하는 수단은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존속하는 한 법은 불법으로부터의 침해에 대한 투쟁을 피할 수 없다.

법의 일생은 투쟁이다. 법 질서의 유지, 사회정의의 실현은 이를 파괴하려는 상대와 싸워 획득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이건 민족의 권리이건 모든 권리는 끊임없는 투쟁을 전제로 차지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 권리를 주장하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권리를 재는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저울 없는 칼은 단순한 폭력에 지나지 않고 칼이 없는 저울은 법의 무력이다.

이상적 법의 상태는 칼을 사용하는 힘이 그 저울을 취급하는 숙련도와 서로 균형을 이룰 때만 존재할 수 있다.
예링은 칼의 폭력에 맞서 균형의 힘이 작용할 수 있도록 모든 국민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이 잘못에 대한 형사적 응징 수단이기에 앞서 권리에 대한 보호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독주에 대한 언론의 감시 견제 기능도 이런 관점에서 충실히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3학년때 250원을 주고 서점에서 사서 지금까지 46년 동안 서가에 꽂아두고 수시로 읽고 또 읽는다. 이제는 누렇게 색이 바래고 활자도 퇴색해 읽기 힘들 정도다.

사실 이 책을 살 때만 해도 나는 139쪽짜리의 이 소책자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또한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법학자의 전문서’(엘릭 윌르프의 말)인 줄은 몰랐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 결정을 위해 각 분야의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 읽던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고, 그것도 항상 사회비리와 법 집행의 공정성 문제를 주로 다루는 사회부 기자로 일관하면서 이 한 권의 책이 이토록 나에게 유익한 길잡이가 될 줄은 몰랐다.

음악이 음표에서 나오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의 침묵에서 나온다면 믿을까.
조직은 사람들이 모여 협업의 원리에 따라 역할을 나누어 설정된 목표를 함께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거미줄 같은 집합체’라고 정의하는 학자가 있다.

여기서 주제어는 침묵, 틈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선이다. 이들 보이지 않거나 만져지지 않는 것이 주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은 양자 패러다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과거 빛은 입자 아니면 파동이라거나 세상이 절대적 시간 속에서 기계 같다고 믿었던 칼테지안-뉴터니안 패러다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것이다.

입증되지 않아 아직 주류과학이 되지 못한 형편에 있는 것도 있지만, 지난 세기 중반 이후의 과학의 발달은 괄목한 것이어서 사회과학이나 생활의 원리를 바꾸어 놓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신과 물질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일원론이라든가, 따라서 열린 정부의 패러다임인 정부와 시장도 하나라는 것, 정책을 하나의 시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나무 하나 하나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숲, 그것도 숲 전체의 꼴과 리듬, 계절 따라 변하는 색깔과 이미지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리더십론에서도 사람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명령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틈에 아름다움과 사랑과 신뢰를 채우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혼돈 속에서도 규칙과 질서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마거릿 휘틀리의 이 책, ‘Leadership and the New Science’(1999, 번역판 21세기 북스)가 맥을 같이하는 하이젠베르크의 ‘Physik und Philosophie’, 토마스 쿤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8), 그리고 최근 앤드루 애벗의 ‘Chaos of Disciplines’(2001) 등과 함께 내 일생 학문의 세계에서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사회과학적 사고를 세상 변화에 맞게 더 과학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요즘도 취미를 독서라고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나는 여기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다. 독서는 사실 삶의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필수 과정이지 선택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 이것은 내적 의지인 동시에 인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2학년때 나는 학교 독서실의 실장을 맡아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적이 있다.

세계 위인전 시리즈는 물론 각종 참고서, 심지어 제대로 이해 하지도 못하면서 두툼한 세계문학전집을 밤새워 가며 읽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그리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집에서 구독하던 중앙지의 사설과 형님이 보시던 잡지 ‘사상계’의 논설을 열심히 읽었다.

이후 책을 읽는 것은 몸에 밴 습관이 되어 지금도 신간서적은 물론 중요한 서적은 대부분 ‘키-노트’를 하며 독서한다.

이런 습관은 행정가로서 또 주민정치를 해야 하는 자치단체장으로서 겸비해야 할 인격 형성은 물론 기획력과 사안을 접했을 때 해결해 나가는 조직력과 논리적, 보편적 사고의 틀을 잡아주는 터전이 되어 나로 하여금 균형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엄청난 자산이 되었음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청소년 시절, 내 인생을 바꾼(?) 책을 굳이 선택한다면 린위탕(林語堂)의 ‘생활(生活)의 발견(發見)’을 들 수 있겠다.
어떤 면에서 내 고등학교 시절은 한마디로 뒤죽박죽 상태였다. 가정적 요인, 종교적 갈구와 방황, 그리고 사회에 대한 반발로 빚어졌던 6·3사태 데모 주동으로 비롯된 장기간의 정학 등 모든 것들이 나를 혼돈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때 만난 린위탕은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인생에 대한 담담한 증언을 해 주고 있었다. 더구나 동·서양을 섭렵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논리는 방황과 반항으로 모자이크되어 과연 어디로 치달을지 모를 것 같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거창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을 그때 뜨게 되었다고나 할까.

린위탕의 생활철학은 미래보다 현실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지나치게 현세적이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범우주적 사상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에서 탈피하여 세계주의를 부르짖고 있어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보편적인 삶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린위탕이 주장하는 인생철학은 동양적이면서도 전통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나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나 훈육보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책 속의 가르침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목표를 설정해 내게 다가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도 린위탕의 담담한 생활 메시지를 통해 무기력한 삶이 아닌 과유불급, 작고 섬세함 속에 담겨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존재가치를 일깨워 충실한 하루하루를 건설하려고 노력한다.늦동이인 초등학교 6학년짜리 우리집 막내는 그 또래 다른 아이들처럼 컴퓨터의 만화와 TV에 매달려 있다. 그런 막내와 나의 끝없는 싸움은 “공부를 해라”가 아니라 “책을 읽어라”다.

1958년 봄.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은 모두 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선망의 눈초리를 모른 채 지나치면서,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동숭동 대학로를 누볐다.

그러나 이런 우쭐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전국의 명문고에서 몰려든 수많은 수재들은 때로 나를 위축시켰으며, 동문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는 분위기는 내게 마이너리티의 설움을 안겨주었다.

1학년 2학기 무렵으로 기억된다. 상대적 위축감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C. M. 브리스톨이 지은 ‘신념의 마력’(The Nagic of Believing)을 발견하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나는 ‘뭔가 나올 듯한’ 제목에 이끌려 책을 사들고 하숙방에 들어가 밤새워 단숨에 읽었 다. 그날부터 나는 무언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2002년 여름. 한국 축구는 ‘붉은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과 국민적 성원에 힘입어 한국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신념이 아니었다면, 월드컵 4강 신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99%가 ‘No’라고 해도, 굴하지 않고 ‘Yes’를 외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저자 C. M. 브리스톨은 제1차 세계대전때 의용군으로 종군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신문기자를 거쳐 투자회사 간부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신념의 마력’에서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명제를 제시한 뒤, 수많은 실례를 들어 ‘믿음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인간의 잠재의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저자의 명쾌한 설명을 들으면서 흥미를 느낄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신념은 ‘행운의 여신은 내 편’식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에 가깝다. 비록 나는 스무살 에 ‘신념의 마력’을 처음 접했지만, 나의 삶에서 ‘믿음의 힘’이 체화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레미제라블. 어렸을 때 누구나 책을 통해 혹은 이야기로 대충 알고 있는 작품이다. 내가 이 작품을 접한 것도 초등학교 시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재미가 있다는 것인데, 책을 잡자마자 한달음에 내쳐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골의 산천과 순박한 이웃들이 경험의 전부였던 촌 소년에게, 세상의 다른 곳 다른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그리고 내가 읽은 책과 나의 경험 이상의 더 큰 세상이 존재할 것이라는 상상은 무엇인지 모를 경의감마저 갖게 했다.

그로 인해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책 속에서 찾으려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내가 가 보지 못한 곳은 그곳을 가보았거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경험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은 그것을 잘 설명한 지침서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판단을 갖게 되었다.

‘레미제라블’을 읽고 느꼈던 막연한 재미로서의 감동은 나이가 들면서 가치의 감동으로 바뀌어 갔다. 평범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내가 살았던 과거의 어느 시대와 흡사하다.

배고픈 동생들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고 그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탈옥을 시도했던 장발장의 불행한 삶은 바로 시대가 준 아픔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아픔을 이길 수 있게 해준 것은 미리엘 신부의 고귀한 자비였다. 그 자비로 인해 장발장은 불행한 사회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이는 스스로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주위까지 변화시켰던 장발장의 삶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형사 자베르의 삶이다. 그는 나름대로의 시대논리로 자신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 했던 시대논리는 과거의 논리였고 구시대의 법이었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용납하지 못하였고, 사람의 변화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의 인식으로는 프랑스혁명도, 그리고 장발장의 변화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벽이었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대비되는 두 등장인물의 삶과 갈등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 가지는 갈등인지도 모른다.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원칙을 갖되 바른 원칙을 견지하고, 과거 속에 안주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변화해야 한다는 과제를 이 두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에게는 끊임없이 주어지는 정치인으로서의 희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이 한 권의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이 아닌 ‘행복한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는, 상식과 원칙이 살아 있는 사회를 향한 희망을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정치인이 된 이후로는 남북관계나 통일문제를 다룬 전문서를 주로 읽었기 때문에 일반 교양독서는 학창 시절 것이 대부분이다. 나는 대학교 시절 책을 많이 읽었다. 원래 책 읽기를 즐겨서라기보다 은사님 덕분이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중 당시 대학원장으로 계시던 이종린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는데, 선생님께서는 늘 불러 이 책 저 책을 추천하셨다.

나는 선생님께 추천받은 책은 빼놓지 않고 읽으려고 했고, 실제로 거의 그렇게 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많이 간 것은 위인들의 전기였다. 특히 백범 김 구 선생, 안중근 의사 등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일대기를 즐겼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을 굳이 꼽으라면 ‘백범일지’를 들겠다. 빈한한 환경에서 출생했으나 바르게 살겠다는 뜻을 세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용기있게 살아온 자신의 행적을 격조 있고 담담한 필치로 엮어낸 ‘백범 일지’를 읽으면서 젊은날 나는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을 죽이기 위해 도쿄(東京)행 길에 오르기 직전 기념사진을 찍는데, 백범이 처연한 기색을 보이자 오히려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했다는 대목이나,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으로 향하는 차에 오르면서 이제 자기에게는 필요 없다며 자기의 세계와 백범의 헌 시계를 바꾸고 남은 돈을 주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장면들은 그때 한번 각인된 이래 지금까지 생생하게 머리에 새겨져 있는데, 지금도 말하는 중에 자주 인용하곤 한다. 이후 백범은 나의 사표가 되었다. 말하고 행동할 때 나는 늘 백범선생이었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그 덕분인지, 천학비재(淺學非才)에도 불구하고 큰잘못 저지르지 않고 살아온 것 아닌가 싶다.

청탁을 받고 오랜만에 ‘백범 일지’를 꺼냈다. 선생께서 직접 쓰신 ‘출간사’를 읽었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때 그 책을 만난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다.

명대(明代) 홍자성(洪自成)이 지은 ‘채근담’(菜根譚)의 제목은 ‘사람이 항상 채근(菜根)을 씹을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룰 수 있다’는 송대(宋代) 유학자 왕신민(汪信民)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필자가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는 38세였다. 그 나이에 얼마나 세상 일을 알았을까마는, 나름대로는 4년간 열심히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그러나 12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유권자들이 야속했고, 필자 자신의 무기력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정신적 혼란으로 전전긍긍하다 우연히 학창시절에 읽었던 채근담을 다시 읽게 되었다. 글귀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감로수(甘露水)였다.

채근담에서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맡기려면 그 사람의 심지를 괴롭히고, 그 배를 주리게 한다’고 했다. ‘선비가 역경에 처하여 온갖 고난을 극복하다 보면 밝은 지혜가 생기고, 강한 의지와 인내력이 생겨 후에 뜻을 얻었을 때 크게 쓰이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필자에게 닥친 괴로움과 배고픔을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기려고’ 주는 시련으로 받아들였고 ‘천도(天道)에 순행(順行)하여 몸과 마음을 닦고, 느리지만 정도(正道)를 걷는 것이 오히려 첩경(捷徑)’이라고 곱씹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을 ‘채근’한 끝에 13대 총선에서 당선된 이후 5선에까지 이르렀고, 제1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채근담은 필자를 오늘까지 이끌어준 글자 그대로의 사표(師表)였다.

대선을 앞두고, 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맡은 바 책임이 막중하다. ‘대나무 숲에 바람이 잦아들면 더 이상 대 우는 소리가 나지 않고, 기러기가 찬 못 위를 날고 나면 물 위에 그림자가 남지 않는다’(風來疎竹 風過而 竹不留聲 雁度寒潭 雁去而 潭不留影).

즉 ‘군자는 일이 닥치면 성심으로 대응하지만, 끝나고 나면 다시 비워 버린다. 억지로 일을 만들지도 않고, 또 지난 일에 집착하거나 미련이 없는 것이 군자의 담백한 마음’이라는 것이 채근담의 가르침이다. 오로지 최선을 다할 뿐, 일이 끝나면 죽불유성(竹不留聲), 담불유영(潭不留影)을 본받고자 한다.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o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司馬遷)이 있고, 서양에 ‘역사’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기’(史記)가 있다.

‘사기’는 동양 정사(正史)의 모범이 된 기전체의 효시라고 평가받거니와,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 12편에서부터 뛰어난 개인의 전기인 열전 70편까지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전 90년에 완성된 이 책은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究明)한다는 범상치 않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역사의 전개가 당시 일반적으로 이해되던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인간 중심으로 된다는 점을 ‘사기’는 냉엄하게 포착하고 있다.

따라서 사마천은 제왕이나 제후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인물 중심의 역사에 비중을 두고 열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념과 원칙에 충실한 사람으로 백이·숙제를 열전의 첫머리에 올리지만 심지어 자객이나 상인 열전까지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역사가 원칙뿐만 아니라 비상수단이나 이익에 의해서도 움직여진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사실 ‘사기’라는 책은 책 자체가 가진 가치 못지 않게 저자 사마천의 불굴의 용기 때문에 고뇌에 가득찼던 내 젊은 한 시절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의 집필에 들어갔지만, 부득이 흉노에 투항한 친구를 변호하다 남자로서 가장 치욕적인 궁형을 당한다. 거세형을 당한 그가 죽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대를 이은 역사서를 완성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이 소명의식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생에 대한 당위와 10년 동안 이 역사서의 집필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준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는 끝내 이 책을 완성한다.

독재정권의 칼날을 피해 철공소로, 사과농장으로 위장취업해야 했던 시절 사마천의 ‘사기’와 그의 개인사는 독재정권은 언젠가 패망한다는 믿음과 역사에 대한 나의 낙관주의를 잉태시켜 주었다.


최인호는 한국 문학사에서 30년대의 이상, 50년대의 김승옥 이래 도시적 감수성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도시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문단 데뷔작인 ‘견습환자’ 이래 ‘타인의 방’ ‘별들의 고향’ ‘지구인’ ‘잃어버린 왕국’ ‘왕도의 비밀’ ‘상도’ 등 많은 작품을 썼다.

그가 어느 일간지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는 동안 공전의 히트를 침으로써, 1970년대 상업주의 소설의 선두주자로 비판의 표적이 된 적이 있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언급하려고 하는 ‘길 없는 길’은 그의 소설 주류인 도시소설·악한소설·역사소설 중 역사소설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데, 가톨릭에 입문한 그가 이런 불교적 구도자의 세계를 비교적 고증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며 다룬 것을 보면 그의 작가적 역량에 나는 놀라워 마지 않거니와 이 작품이 내게 준 감동은 대단한 감격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읽었을 당시인 1993년은 김영삼 정부에 의해 강제 예편되어 시골에 낙향(지금까지 시골에 살지만)한 직후 울분을 삭이던 때였다.

문학작품이 독자와 만나는 것도 독자의 정신적 환경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통념이 일리가 있다면, 전화 한 통화로 군복을 벗기우고 민간 신분이 된 내게 ‘길 없는 길’은 천직 같은 군대를 떠나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에 대한 메시지 같은 화두였고, 이 소설 속에 이 화두가 어느 정도 용해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읽었다.

‘길 없는 길’은 근세 한국 선(禪)불교의 중흥 조사인(?) 경허 스님과 그 법통을 계승한 만공을 비롯한 선사들의 선문답들을 소설로 구성한 것으로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자인 나에게 불교의 선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또한 소설적 재미를 위한 얼개도 주인공 강빈(?)의 어머니 기생 초선과 아버지 의친왕 이강 그리고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공민왕의 거문고와 경허·만공·의친왕·강빈의 4대에 걸친 비밀이 극적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속도감과 역동적 경험을 중시하는 현대인 특히 청소년들에게 선불교는 고리타분할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속 선사들의 재치 넘치는 화두는 재미와 인생에 대한 생각을 추스려 보는 광장을 제공해 주고 있어 감탄스럽다.

가령 ‘일 없음이 내 할 일’이라는 경허 스님의 말씀은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가를 되묻게 되는 공안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얘기는 집착에서 야기된 번뇌를 끊는 구도자의 결단을 통해 우리 중생들도 가끔은 명상을 통한 마음의 평화와 평정의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우선 손에 든 순간부터 책을 놓기가 싫을 만큼 재미있다. 사회의 얼룩진 그늘이 너무 많아 감각이 무뎌질대로 무뎌진 이 가을에 협착한 자아의 벽에 갇혀 버둥거리지 말고 선사들의 큰 호흡이 토해내는 화두 한두 개라도 붙들고 ‘길 없는 길’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길 없는 길을 가다보면 길을 만날 수 있고, 오솔길을 벗어나면 큰길이 나올 수 있겠기에 말이다.


이즈음 대학가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이 쟁점화되하고 있다. 주류 기독교가 이단시하는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의 일체의 폭력에 대한 거부신념이 일반적인 평화주의자에게로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는 법률로 금압할 수 없는 천부의 자유권이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할 경우 제한할 수 있다.’(헌법 37조) 당장 충돌하는 두 입장은 지금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유엔 인권위는 징병제 국가를 향해 매년 양심적 집총 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입법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분단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당장 ‘군대 가면 비양심적인가?’라는 질책과 비난이 쏟아진다.

어떠한 제도도 국민의 동의와 합의 없이 정착되기는 어렵다. 이뿐 아니라 국가보안법 개폐문제, 준법서약서와 보안관찰처분 등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의 금과옥조라 할 세계인권선언에 정면으로 반하는 법률과 제도를 우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분별없는 일부 안보상업주의와 사상의 철저한 우측통행만이 지배하게 된 분단체제 탓이다.

단세포적 이분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야만국이다. 이 야만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용’을 학습해야 한다. 이 젊은 학자는 지금처럼 이 문제들이 국가적 의제로 부상하기 이전부터 일찍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옭죄고 있는 냉전과 독재를 위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설명하고 설득하고 있다.

학자의 방언으로 쓴 논문이 아니라 대중적 글쓰기의 방식을 택한 것 역시 적절하다. 사회 전체의 합리성의 기준을 높이는 작업이다.
나는 늘 꿈꾼다. 경제성장의 속도가 조금 더디더라도 나와 다른 생각에도 마음을 여는 국민이 많아지기를….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곧바로 빨갱이로 치부하는 단세포적 사회는 문명국이 아니다.


요즘 더 그렇지만 20대 후반 늦깎이로 신학교에 들어간 내 젊은 시절의 관심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관심을 붙들어매 준 책이 바로 브라질의 알바로 바레이로 신부가 쓴 ‘기초 교회 공동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였다.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란 나는 신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현장체험을 다니곤 했다. 그러다 가본 곳이 성남시 은행동에 있는 ‘메리놀공동체’였는데, 여기서는 메리놀 외방선교회에 속한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 모두 여섯 명이 그야말로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계셨다.

두 번에 걸쳐 모두 보름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이분들에게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여기서 추천받아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신학교에서 논문을 쓰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번역을 하며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지은이는 말한다. 복음이 본래의 새로움을 지니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으로 들려지고 받아들여졌던 그런 시대와 상황이 교회의 역사 안에서도 존재했었다고.

그런 경우 복음은 해방하고 구원하는 위력을 발휘하는데, 복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순수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전해지면 복음은 이들 안에서 희망의 불을 타오르게 하여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브라질 전역에 흩어져 있는 수만의 기초교회공동체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을 역동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위대한 계시와 그가 가져온 기쁜 소식의 철저한 혁신은 바로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위한 그의 우선적인 사랑에 있다.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하는 데 실패한 교회,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 의해 복음화되지 않는 그러한 교회는 중산층에 의해 유지될 것이고, 사회에서 ‘안정되고’ ‘특권’을 보유할 것이며 ‘영향력’을 지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다.’ 하느님을 믿되 교회에 대해 회의하는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람은 책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고, 그것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책을 예로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일본에서 국민작가로 떠받드는 시바 료타로(司馬遷大郞)의 대하 장편소설 ‘언덕 위의 구름’(전 10권)을 꼽고 싶다.

약 23년전, 경감 시절 나는 일본의 선진 경찰제도를 배우고자 유학을 자청해 일본 경찰대 본과 52기를 졸업했다. 이때 내가 귀국길에 가져와 탐독한 책이 시바 료타로의 이 일어판 대하소설이다. 한국에서 이 책이 번역 출판된 때는 1991년으로 한참 뒤다.

이 책의 배경은 일본 역사에서 최대의 격동상을 연출했던 메이지(明治) 시대를 축으로 1905년의 러일전쟁의 전말을 담아내고 있다.

무적(無敵) 러시아 코사크 기병을 격파함으로써 세계 전쟁사에 한 획을 장식한 일본 육군성 장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와 육군 기병의 창설자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郞好古) 그리고 해군성 장관 야마모토 곤베어(山本權兵衛)와 해전의 명참모 야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의 삶 등을 추적하면서, 이들 인생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여준다.

자신의 삶과 국운(國運)을 개척해간 메이지 시대 이 주인공들의 삶의 역정을 통해 나는 ‘언덕 위의 구름’으로 표상되는 이상과 야망을 배울 수 있었다.

봉건제 군 조직을 개혁함으로써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든 고다마 겐타로와 야먀모토 곤베어의 개혁정신은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주어진 악조건을 뛰어넘어 조직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전인격적(全人格的)으로 투신한 야키야마 형제의 투철한 직업의식 역시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들 주인공의 삶의 자세와 철학은 내가 경찰 총수로서 한국 경찰의 500여 개혁과제를 실천에 옮길 때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다. 세계 최강의 글로벌스탠더드를 지향했던 야마모토의 개혁정신, 그리고 10개년 계획으로 자신의 청사진을 실천에 옮긴 고다마의 삶 역시 나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들처럼 나 또한 한국 경찰의 청사진을 계속 고쳐 쓰며 이를 실천해낼 방도를 기다렸다. 마침내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그간 꿈꾸어온 경찰개혁을 과감히 실천에 옮김으로써 내 임기중에는 한국 경찰이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개혁한다는 것은 무수한 희생과 피와 땀이 따르고, 리더의 신속하고도 정확한 판단 또한 요구된다. 하지만 역사의 페이지를 바꾸기 위해, 국가와 국민을 위해 개혁은 항상 필수불가결하다.

시바 료타로를 통해 나는 그것을 배웠다. 개인주의에 함몰돼 나라 걱정하는 사람이 없는 요즘, 이 책의 가치가 새삼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험한 산속을 헤매다 어둠을 만났을 때 한 줌의 달빛은 길을 찾아준다.’ ‘제로섬 사회’(The Zero-Sum Society)라는 책이 바로 내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방황할 때 교수의 길을 비춰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레스터 서로(Lester C. Thurow)는 MIT 경제학과 교수로 미국경제의 모순을 통열하게 비판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소신파 교수다. 한 교수의 지식과 소신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가.

당시 유학중이던 나에게서 경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가슴을 설레며 책상에 다가앉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한 사람의 소득 증가가 다른 사람의 소득 감소를 가져오는 제로 섬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정부가 소득 및 부의 재분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민간부문과 시장의 창의성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

이는 1970년 말부터 경기 침체와 물가 불안의 악순환에 빠져 소득격차의 심화와 산업기반 붕괴라는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던 미국경제에 파문을 던졌던 ‘제로 섬 사회’의 주장이다.

이후 미국의 경제정책은 시장기능에 입각한 공급 측면의 정책으로 방향이 바뀌었고 이는 1990년대 최대 호황을 이룬 신경제로 연결된다. 물론 서로의 주장은 미국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데 작은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학문적 주장을 진실하게 펴고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면 그것은 교수로서 더 없이 큰 보람이다.

1982년 필자가 고려대 교수로 부임할 당시 우리 경제는 이미 심각한 구조적 모순에 빠져 있었다. 독재권력과 재벌기업들의 정경유착 체제 하에 경제는 병들고 소득격차는 날로 심화되었으며 물가고와 실업의 고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상태에서 1990년대 경제 개방이 강요되자 스스로 무너진 것이 바로 IMF 위기다. 이 과정에서 교수로서 위기감과 분노는 컸다. 따라서 글을 쓰거나 방송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경제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외쳤다. 그러나 광야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메아리는 없었다. 거꾸로 외부 강의나 연구용역 등에서 불이익만 컸다.

그때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계속 용기를 불어넣어준 책이 ‘제로 섬 사회’다. 이제 우리 경제는 또 다른 난관에 부닥쳤다. 신자유주의를 무기로 하는 선진 강대국의 침략 공세 속에서 스스로 솟아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경제는 다시 쓰러질 수 있다. 대형 파도 속에 방향을 잃은 배와 같은 우리 경제를 위해 더욱 용기를 내야 한다는 이 책의 외침이 날이 갈수록 크게 들린다.


새천년을 맞이하여 온 지구촌이 한바탕 들썩거릴 무렵 사람들의 주목을 끈 기사가 있었는 바, 그것은 로마 교황의 새천년 하례였다. 교황은 그 교지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지구상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꼽았다.

하지만 나는 교황의 ‘발견’에 대해 지난 1,000년 지구상에서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세까지 유럽인들의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세계관이었던 천동설에 대응하여 ‘천지개벽할’ 지동설이 주창된 것이야말로 지난 1,000년 동안에 있었던 가장 큰(개벽적인) 사건이며, 콜럼부스에 의한 신대륙(?)의 발견도 사실은 바로 그 지동설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던가 하는 말이다.

21세기를 맞는 새천년 전환기에 이미 우리는 코페루니쿠스보다 더 개벽적인 새로운 세계관과 만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은 하나’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은 하나’ ‘동식물과 무기물까지도 원래 한 생’이라고 하는 이른바 ‘생명사상’이다.

나는 1980년대초 감옥에서 막 나온 김지하 시인의 영향을 받아 생명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생명의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개벽적인 물리학 이론인 ‘엔트로피’(ENTROPY)를 알게 되었다.

엔트로피는 과학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불리는 개념이다. 나는 196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 뉴턴 역학에 대해 피상적으로 배웠다. 그러다 열역학 법칙에 제1법칙(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제2법칙(사용 불가능한 에너지 증가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 정음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제레미 리프킨의 책 ‘엔트로피’를 통해서였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변화할 때 부분적으로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흔히 公害)가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그리하여 인류가 직면한 생존의 위기를 해결하고 새로운 세계관과 문명관을 확립하기 위해 기존 패러다임을 대체하도록 제시된 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뒤집는 이 ‘개벽적인’ 세계관은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지속 가능한 개발회의’가 바로 ‘엔트로피’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과 모색의 장이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다양한 지식과 재능의 원천이 되는 책도 있지만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책도 있다.

나의 경우 평범한 행복이야말로 인간 최대의 행복이라는 인생관을 갖게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책이 있으니, 그리스의 작가 카잔차키스가 쓴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이라고 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최대의 욕망’(The Largest Desire of Christ)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예수가 간절히 이루고 싶었던 ‘평범한 생활 속의 평범한 행복’은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최대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환상 속에서 가장 이루고 싶었던 욕망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데, 예수는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평범하게 사는 것을 가장 바랐다.

낮에는 아내와 함께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 나절에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준비하고, 자신은 마당에서 아이들과 장난을 하며 즐거워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격하하는 것을 넘어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게 볼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두 가지 큰 교훈을 얻었고, 이것은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우선 나같이 사회운동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은 비범한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실로 비범한 활동을 할 수 있으려면 오히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권력이나 부를 쫓는 욕심의 정치가 아니라 멸사봉공의 정치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간 최대의 행복은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돈을 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속에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데 있음을 일깨워준 것이다. 이런 인생관과 행복관을 갖게 되면 불필요한 욕심을 내지 않을 것이다.

높은 지위를 얻거나 많은 돈을 벌어야 행복하리라는 생각에서 온갖 불법적 행위를 일삼는 일이 많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인생관과 행복관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전 선친한테서 한문을 배우면서 아버지로부터 사람의 본성과 도리 등에 대하여 많이 배웠다. 아버지 말씀은 항상 정직하고 선하게 살라는 교훈이셨다.

그러나 맹자(孟子)의 성선설과 순자(筍子)의 성악설이 대립해서, 어릴 때 내 마음으로는 사람이 정말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항상 의문을 간직한 채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에서는 경제학 입문에서부터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나 그 충족의 대상인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제행동을 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무한한 욕구가 정말 인간의 성정(性情)인지, 그것이 현실 경제사회에서는 어떤 동기와 역할을 하며 어떤 문제점을 야기하는지, 그 기능을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이런 지적 호기심의 눈을 번쩍 뜨게 한 책이 대학 재학중에 발견한 T.홉스(Thomas Hobbes)가 쓴 ‘리바이어던’ (Leviathan)이다. 이 책은 홉스가 50대의 완숙기였던 1651년에 쓴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리고 ‘리바이어던’은 T. 홉스가 막강한 국가권력 또는 주권에 관한 논의를 하고 싶어서, 상상의 괴물 이름인 리바이어던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T. 홉스의 인간관은 ‘자연상태의 사람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는 참혹한 성질을 지닌다.’ 그래서 ‘국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향유하는 잔인한 인간의 자연권을 포기하며 그것을 어떤 사람 또는 인간집단 (국가권력 필자주)에 주어버림으로써 생긴다’고 보았다.

책은 또 필자가 경제학을 배우면서 오랫동안 의문을 지녔던 경제인의 본질, 즉 경제학의 기본 공준인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다’는 외에 6가지 공준(公準)을 충분히 설명 논증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릴 때부터 품었던 인간상에 대한 의문을 기본 공준으로 삼아 내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적어도 철학이나 사회과학을 하는 분에게는 비슷한 감동과 학문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감수성 많은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책을 권해주신 분은 고려대 김우창 교수님. 한국 농촌문화에 관한 내 시집 ‘이삭줍기’의 해설을 해주신 그분을 찾아 뵙는 자리에서였다.

1860년에서 30년 동안 미국 서부의 위대한 신화를 만들어낸 것은 모피 상인·산 사나이·증기선 안내인·노다지꾼·도박꾼·총잡이·기병대·카우보이·매춘부·선교사·여교사·개척 농부들이다.

이 신화의 뒷면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미국 인디언의 문화와 문명이 파괴되고 인디언 대학살의 잔혹함과 폭력이 은폐되어 있음을 이 책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디언의 조상은 몽고족이다. 대략 2만여년 전 시베리아에서 당시 대륙으로 연결되었던 베링 해협을 건넌 이들이다. 멕시코·유카탄반도·콜롬비아·페루로 남하한 인디언들은 저 위대한 잉카문명과 마야문명을 건설했다. 뒷날 스페인과 유럽인들이 두 문명을 파괴하고 인디언을 멸망시켰다.

1600년 무렵만 해도 미국 인디언은 총이나 말타기, 말 기르는 법을 몰랐다. 탐욕적인 유럽인들이 미국 서부로 몰려들어 수천년 된 인디언의 생활터전을 짓밟아 버리기 전에는 자연과 함께 행복했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모피 상인들이 모피를 얻을 욕심으로 인디언들에게 총·쇠칼·화살촉·창날·옷감·담배·구슬·모포·럼주(酒) 등을 갖다 주었다. 스페인인이 말을 가져왔고, 영국과 프랑스인이 사냥총을 갖다 주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유럽인들은 더욱 탐욕의 노예가 되어 인디언들의 광활한 생활 터전과 생명까지 빼앗았다.

미국은 이를 서부 개척시대의 신화로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살아 있는 인디언은 나쁜 인디언이니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미국식 반어법이다.

20세기 이후 미국은 폭력으로 평화를 만들겠다고 한다. 언제, 어떤 민족이 미국으로부터 ‘좋은 인디언’으로 선택될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이다.
저자인 네루 자신은 인도의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했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인생역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6년 그의 표현에 의하면 ‘밑바닥을 흔드는 급소 중의 급소를 발견하는 천재’인 간디를 만난 후 정치적으로 훈련받게 되면서 간디와 함께 반영(反英)투쟁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총 여덟차례에 걸쳐 9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세계사 편력’은 그에게 시간적 여유를 허락한 감옥에서 집필되었다. 필자 또한 1979년 옥중에서 이 책을 접하였으니 네루의 글에 더욱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후에 인도의 총리가 된 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된다. ‘세계사 편력’은 어쩌면 세계의 역사를 기술한 수많은 세계사 중 하나일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세계사 편력’을 읽으면서 사관(史觀)의 의미를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줄곧 사관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왔지만, 사실상 승자 또는 가진 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를 공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다시 한번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발전시켜온 주역이 누구였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서구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아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 세계의 역사에서 여성들이 때로는 부드럽게, 그러나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변화는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온 가슴으로 두 팔 벌려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동력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사람에게 어떤 불행이 오는지도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강물과 같은 것이다. 결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인 것이다.

성경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들어 있다.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욥이란 사람은 온갖 어려움과 위험에 처해도 소신과 지조를 버리지 않고 인간승리를 이루어 낸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참고가 된다.

신약에서 뜨거운 마음의 감동을 느낀 대목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행적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 발을 씻어 주고 마지막 식사를 했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님의 뜻대로 하소서.”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했다.

“나는 마음이 산란하여 잠을 이룰 수 없는데 너희들은 왜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느냐?”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낀 바가 크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도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죽는 것이지, 제자가 죽는 게 아니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그때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하고 서글펐을까.

내가 성경에서 교훈을 얻은 것은 많지만 두 가지만 더 말하겠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세 번이나 용서해 준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나 모두 용서해준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베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관용의 종교가 아니라 보복의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사도 바울의 존재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탄압하던 경찰의 두목 격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니다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바울아, 바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갑자기 눈이 멀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유대 귀족인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유대교로서는 바울이 역적이었다. 바울은 결국 유대 나라에서 살 수 없어 외국으로 탈출해 예수님을 전도하였다. 그렇게 해서 예수교가 세계종교가 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인생의 모든 행로는 우연이 아니다.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욥의 고난과 예수의 죽음, 관용 그리고 사도 바울의 존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교훈과 중요한 지혜를 가르쳐 준다.

성경은 지금도 불경이나 다른 인생의 지침서처럼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끊임없는 지혜와 용기의 샘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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